소생[유희경의 시:선(詩:選)]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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‘폭설을 뚫고 자라난 존재는 사월의 속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// 어떤 기억은 발음에 익숙한 쪽으로 굽어 있다// 침묵에는 누락된 눈빛이/ 포옹에는 누락된 시간이// 나를 통과한 산수유는 모두 부러졌다// 약속이 있었다/ 여러 사람이 울었다 우는 동안 시절이 바뀌었다’

- 이훤 ‘약속이 있었다’(시산문집 ‘청년이 시를 믿게 하였다’)

꽃은 피는 게 아니라 나타난다. 잠시 한눈을 팔다 돌아보면 거기 꽃이 있다. 집 앞 놀이터의 산수유가 그렇다. 어제만 해도 없었는데, 아니 없던 것 같은데 오늘 아침엔 노랗게 봄꽃. 이윽고 진달래가, 벚꽃이 홀연히 나타나리라. 죽은 듯 말라붙어 있던 가지에서. 이곳저곳에서.

소생의 계절이다. 좀처럼 키가 자라지 않고 새잎 소식 없던 화분 속 고무나무가 볼록, 새순을 피웠다. 한껏 들떠 있다가 궁금해진다. 내가 언제부터 꽃 피는 일에, 나무가 내미는 여린 잎사귀에 흥분하였나. 언젠가 가까운 선배의 말이 떠오른다. “이제는 꽃 사진 찍는 일에 거리낌 없는 나이가 되었어.” 피식 웃는다. 아닌 게 아니라 선배는 함께 걷는 중간중간 꽃을 보면 멈춰 서서 스마트폰을 꺼내곤 했다. 나는 이 ‘증세’가 비단 나이 탓만은 아닐 거라고 짐작한다. 그보단 ‘이해’가 생긴 덕분이리라. 겨울을 통과하는 동안의 견딤이 어디 식물에만 있을까. 혹독했던 지난겨울을 살아낸 건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. 마침내 따뜻해지고 환해지는 계절이 오면 마음 어딘가 탁 트이고 새 용기와 희망이 솟아난다. 꽃처럼 새순처럼. 내가 환영하는 것은, 선배가 사진 찍는 것은, 여전히 살아 있는 나 자신이 아닐까.

사월이다. 사방을 뒤덮는 생기는 ‘죽은 땅’을 딛고 서기에 T S 엘리엇은 ‘가장 잔인한 달’이라 노래했다지. 그러니 이토록 화려한 계절이 지난 시간의 덕분인 것을, 소생이란 기쁨은 죽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나는 또 안다(잘 안다). 그러므로 기억하려 한다. 지금과 미래가 어디에서 도래하였는지를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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